왜 우리는 부품이 될 수 없는가
- argentum92
- 4월 30일
- 2분 분량

태생적으로 개개인의 존재를 인정할 수 없는 시스템이었던 평균과 표준화.
그렇다면 왜 지금의 우리는 이를 비판적으로 바라봐야 하는 걸까요?
표준화(인간의 부품화)로도 기업은 수십 년 이상 경영되어 왔는데, 왜 자꾸 개인을 말하는 것일까요?
간단합니다.
‘표준화, 즉 인간의 부품화는 결국 전체의 손해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공산품이 아니다.
사실 ‘표준화’ 자체는 나쁜 것이 아닙니다. 대표적인 예시가 의약품이죠.
똑같은 상표의 약이 먹을 때마다 효과가 달라진다면? 재앙을 초래할 수 있습니다.
같은 사이즈로 설계된 밴드가 매번 다른 크기로 나온다면? 그 또한 큰 문제입니다.
즉 ‘공장에서의 기성품 대량생산’이 인류에게 가져다준 혜택은 어마어마합니다.
다만 이 ‘표준화’와 ‘개개인성’이 양립할 수 없는 관계라는 것이 비극이었습니다.
개개인성은 결국 모두가 다름을 인정하는 것이기에,
‘어떤 상황에서도 똑같은 결과물을 내야 하는’ 표준화 공정에서는 리스크로 작용할 수밖에 없었죠.
때문에 산업화 초창기부터 개인은 시스템에 맞춰질 것을 요구받았습니다.
<모던 타임즈>가 명작으로 남은 건 우연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압니다.
이 표준화 속에서 평생을 살아갈 수는 없다는 것을요.
사람은 사람이지, 공산품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되 인간일 수 없는
표준화 시스템 속에서 살다 보면 모든 것은 예측 가능해집니다.
몇 살 때는 어디로 어떻게, 또 언제는 어디서, 이때에는 어느 곳에서.
이 예측은 커리어를 쌓을 때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A라는 분야에서 일하고 싶으면 a라는 전공을 택해야 해.
a를 택했으면 이제 어떤 활동을 하며 준비해야 해.
여기에 서류는 어떻게 준비해야 하고 뭘 더 해야 해.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
그렇게 사다리를 한 칸 한 칸 밟아 나가면 된다 합니다.
하지만 그 안에 나는 없지요.
내가 원하는 것, 내가 좋아하는 것, 내가 바라는 것.
‘나’라는 존재가 전혀 없는 사다리 오르기.
과연 그 안에 ‘인간으로서의 나’는 있을까요?
또한 그 끝에서의 나는 정말 웃고 있을까요?
모든 것을 누르며 올라가야 하는 사다리의 여정에서, 옆을 볼 시간은 있을까요?
또한 그런 이들이 모인 조직은 팀으로서 존재할 수 있을까요?
남들 모두와 똑같되 더 뛰어나야 하는 세상에서.
충족감 속에서 사람은 사람을 바라본다.
여기서 표준화의 이면이 드러납니다.
분명 약속했으나 그 끝에 계약한 것이 없다는, 지독한 모순이.
그래서 저희는 사람으로서 살아가는 길을 꿈꿉니다.
사다리가 아닌 길, 모두에게 다르지만 그렇기에 더욱 귀한 길을요.
조직이 구성원을 개성을 지닌 인격체로 대하고,
개개인은 서로 다른 맥락 속에서 자신들의 동기 속 능력을 펼치고,
그 안에서 충족감을 느끼고,
덕분에 몰입이라는 시너지로 되돌아와 다시 선순환을 받을 수 있기를.
사람이 사람을 바라보고,
오늘도 인간으로서 살아냈다며 행복해하기를.
“블루밍고는 구성원이 '인간답게’ 일할 수 있는 조직을 꿈꾸며, 그 길은 무엇일지 고민하는 이들이 모인 팀입니다.”
참고문헌:
<다크호스>, 토드 로즈 저, 정미나 번역/이우일 감수, 21세기북스
유튜브 계정 <Modern Times> 영화 https://youtu.be/KUbvdZOMXMI?feature=shar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