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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적인 회사 생활은 나쁜 걸까요?

  • argentum92
  • 2월 12일
  • 3분 분량

최종 수정일: 3월 8일



‘감정적이다’

이 말을 들으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시나요?

2020년대를 살아가는 직장인으로서 그 이미지는 어떤 느낌이신가요?


아마 두 질문 모두 부정적으로 답한 분이 많으실 거라고, 감히 짐작해 봅니다.

(정답이 있는 것이 아니니 그저 떠오르는 대로 편히 생각해 주시면 됩니다! :) )


실제로 이성과 감정은 오랜 시간 대척점에 서 있는 관계로 이해되어 왔습니다. 

국어사전을 들여다보면 ‘감정적’ 이라는 말의 예문으로 ‘그는 이성적이라기보다 감정적인 사람이다’ 가 제시되어 있고, 유의어로는 ‘충동적’ 이라는 표현이 실려 있을 정도니까요.

(반의어는 다들 짐작하시겠지만 ‘이성적’ 입니다.) 


이미지 출처: 네이버 국어사전
이미지 출처: 네이버 국어사전
이미지 출처: 네이버 국어사전
이미지 출처: 네이버 국어사전

덕분에 21세기의 우리는 ‘일터에서만큼은’ 더없이 이성적이려 오늘도 고군분투합니다.

이성적인 것이 곧 합리적인 것이고, 감정은 직장에서만큼은 내려놓아야 하는 것이며, 감정과 업무는 분리되어야 한다는 신조로.


그런데 이 관점이 정말 ‘옳은 것’이던가요?

질문을 조금 바꾸어 보겠습니다.

인간으로 태어나 감정 없이 살아가는 순간이 있던가요?

감정을 느낄 수 없다 말하는 가족, 친구, 친척, 지인이 있다면 우리는 일차적으로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살아가는 데 있어 정말로 감정이 ‘충동적이며’, ‘이성과 대립하는 관계인’, 통제해야 하는 것으로만 존재하던가요?


그렇다면 이 ‘감정 대 이성’ 의 구도는 어떻게 정립되었던 걸까요?

어떻게 받아들여졌고 지금껏 이어져 내려왔으며, 어떻게 우리에게 ‘이성이 옳다’라는 사고를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끊임없이 내재하게 했던 것일까요?

이번 포스트에서는 이 오래된 신화의 기원을 조금 파헤쳐 보고자 합니다.


  1. 2천 년간의 신화

사실 이 오랜 틀을 정립한 이는 뇌과학자도, 생물학자도, 의사도 아니었습니다. 철학자였죠. 

더 정확히 말하자면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이었습니다. (네, 그 유명한 플라톤 맞습니다.)

그가 인간의 내면을 전쟁터로 묘사한 것이 신화의 시작점이었습니다.


플라톤은 인간의 마음*(psyche)이란 자기 행동을 통제하고자 하는 와중 세 가지 내면의 힘이 벌이는 끝없는 전투 현장이라고 보았습니다.

첫 번째 힘은 식욕이나 성욕 같은 기본적인 생존 본능,

두 번째 힘은 기쁨, 화, 두려움과 같은 감정,

그리고 세 번째 힘은 이성적 사고.

이 중 앞의 두 개 힘인 본능과 감정은 인간을 파멸로 이끌 수도 있는 야수이니, 우리는 더 옳은 길로 가기 위해 ‘이성’을 갖게 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야수에게 고삐를 채워 통제하기 위해, 생존 본능과 감정이 일으키는 혼란에 대응하기 위해.

플라톤이 철학사, 더 나아가 지성사에 끼친 어마어마한 영향 덕에 이 마음의 전쟁 이야기는 2천 년간 그대로 이어져내려왔습니다. 

그러니 뇌에 대한 연구가 시작되었을 때 학자들이 플라톤의 시각(인간의 마음은 3중 구조이다)으로 접근했던 것도 전혀 이상할 게 아니었죠.

덕분에 이 서사는 ‘3중 뇌 가설 (3층 뇌, 뇌의 3층 구조)’** 담론의 형성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psyche: 고대 그리스어로 '숨', 혹은 '나비'를 뜻하던 단어. 시간이 흐르며 그 의미가 마음, 생명, 정신, 영혼 등으로 확장되었습니다.

**현재 뇌의 3층 구조 가설은 학계에서 오류로 결론난 상태입니다. 기회가 되면 다른 포스트에서 더 자세히 다루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21세기의 고정관념은 20세기에도 유효했다

오랜 시간 동안 이어진 이 고정관념(이성-감정 간 대립). 이 통념이 현대까지 굳게 자리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 단적인 예가 있습니다.

2차 대전이 한창이던 1943년의 미국으로 가볼까요.

전시였던 만큼 국가 자원이 총동원되던 시기였고, 국가는 국민에게 전쟁의 필요를 끊임없이 역설해야 했습니다. 

가장 직설적으로 전쟁의 이유와 국민의 역할을 선전해야 했던 이 시기의 선전물은 바로 그 이유로 세상에 대한 당시의 시각을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디즈니가 제작해 1943년 8월 방영된, 제목부터가 <Reason & Emotion (이성과 감정)>인 이 단편 애니메이션.

내용을 보면 현재 우리가 ‘감정적’이라는 말을 대하는 태도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감정(Emotion)은 원시적인 날것의 존재, 이성(Reason)은 문명화되어 그런 감정을 통제하고 다스리는 존재.


이미지 출처: 유튜브 채널 Coconut Press
이미지 출처: 유튜브 채널 Coconut Press

이미지 출처: 유튜브 채널 Coconut Press
이미지 출처: 유튜브 채널 Coconut Press

<Reason & Emotion>의 한 장면. 

1943년 8월 디즈니가 2차 대전 프로파간다의 일환으로 제작한 이 단편 만화는 현대까지 내려오는 이성과 감정의 관계를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이성은 운전석에 앉아 모든 걸 주도하며, 감정은 원시적이며 이성 뒤로 물러나 있어야 하는 자질로. 두 요소는 머릿속 위치에서부터 강한 대비를 이룹니다.


이미지 출처: 유튜브 채널 Coconut Press
이미지 출처: 유튜브 채널 Coconut Press

나치 정권 치하 독일인들의 머릿속을 묘사한 장면을 볼까요. 히틀러의 연설을 듣던 독일 국민의 머릿속 감정은 점점 커지다 못해 마침내 이성을 위협하고 옴짝달싹 못하게 하기에 이릅니다. ‘아예 합리성이라는 것을 상실한 적국’이라는 이미지를 비추는 데에 이성-감정 간 관계가 활용된 예입니다.


이미지 출처: 유튜브 채널 Coconut Press
이미지 출처: 유튜브 채널 Coconut Press

애니메이션 마지막에서 비춰지는, 미군 항공기 조종사의 머릿속. 최후의 최후까지 ‘합리적인 자’의 머릿속 조종간은 이성이 잡고 있습니다. 감정은 옆에서 부차적인 역할을 수행할 뿐, 주도권은 언제나 이성이 가져야 한다는 관념을 보여줍니다.

80년 전의 만화임에도 '감정-이성은 나뉘어지며 이성이 최고의 자질'이라는 구도가 친숙했던 건 저뿐일까요?


  1. 과연 이성만이 합리일까

이성과 감정의 분리. 그리고 이성에 의한 감정의 통제.

이 모델은 수천 년 전 한 철학자에게서 시작되었고 그 설명은 지금까지도 위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뚜렷한 근거가 없음에도.

그렇다면 ‘감정적이다’ 라는 표현이 그토록 부정적으로 인식되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성만이 우리의 합리성을 대변하며, 그렇지 않은 경우는 모두 비이성적이니 비난받아 마땅한 경우일까요?


아니요.

감정 역시 엄연한 인간의 일부이고, 이성과 떨어뜨려 생각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닙니다. 

오히려 감정과 이성, 둘은 분리되지 않으며 마치 태극의 음양처럼 인간의 지각 체계를 구성하고 있다는 것이 현대 뇌과학의 입장입니다.

근거가 있냐 물으신다면, 물론입니다.

어떻게 우리 뇌가 세계를 지각하는지, 왜 3층 뇌 구조가 오류인지, 신체 예산의 관점에서 어떻게 합리성이 설명되는지.

그 역시 앞으로의 포스트에서 풀어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니 ‘일터에서는 일에만 집중하고 이성적이자!’ 라는 생각을 자주 하셨다면, 부디 오늘 하루만이라도 그 생각을 잠시 접어 두시기를.

인간이 이성을 통해 감정을 제어(control)할 수 있다는 것은, 2천 년 전의 옛 철학자가 제시한 신화였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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